박수량
- 호삼가당(三可堂)
- 출생년도1475년
- 사망년도1546년
조선의 학자이며 효자로서 자는 군거(君擧), 호는 삼가정(三可亭)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단상법(短喪法)이 엄하던 연산군때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여막(廬幕)에 살아 중종반정 후 고향에서는 효자로 정문을 받았다.
이어 중종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용궁현감(龍宮縣監)에 임명되자 임금에게 사은숙배를 올리던 날 임금은 그에게 묻기를 "요순시대의 정치를 지금도 다시할 수 있느냐?"하자 박수량은 "신이 시골에 살았으므로 풀의 본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풀이라는 것은 옛날에 단풀은 지금도 그 맛이 단 것 입니다.
풀의 성질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과 같이 우리 인간도 어찌 본성이 고금에 다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요순의 정치를 지금이라 못할리 없습니다" 라고 하자 임금께서 탄복하시고 가상히 여기셨다.
벼슬에 있을 때 형제가 토지관계로 싸움을 하기에 공은 그들을 불러들여 타이르기를 "토지는 얻기 쉬우나 형제는 얻기 어렵다. 내가 덕이 없어 너희들이 이렇게 싸우니 내가 무슨 면목으로 너희들을 다스리는 주인 노릇을 하겠느냐"하고 눈물을 흘리니 그들은 그 자리에서 크게 깨닫고 드디어 그 소송문서를 불살라 버렸다.
때마침 기묘사화가 일어나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해변반석에 소나무를 심어놓고 그 위에서 해가 지는 것도 모르고 거닐며 돌아갈 줄 몰랐다.
공이 태어날 때 중국 사신이 와서 말하기를 "모년모월모일에 동국땅에 처사성이 나타난다"고 했으며, 죽을 때에도 중국 사신이 또 와서 동국땅에 처사성(處士星)이 떨어졌다고 하였는데 그것을 자세히 고찰해 보니 그날은 선생께서 별세하던 날 이었다고 하였다.
사신이 돌아가 황제에게 아뢰자 사관(史官)은 특별히 "모년모월모일에 동국처사 박수량이 죽다" 라고 기록하였다.
도암(陶庵) 선생이 지은 묘표명의 시 가운데 "만고에 꿋꿋함은 송백의 절개같아 엄동설한 눈서리에 끄떡도 하지 않네. 내가 사양금을 한번 타고자 하여도 해운이 자욱하여 돌아오지 못할거야"라 하였다.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로 파직당했다.
고향에 돌아와 종질(從姪) 박공달과 함께 시주(詩酒)로서 여생을 마쳤다.
그의 문집으로《삼가집(三可集)》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