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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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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소개 > 일반현황 > 읍면동 지명유래 목록 - 번호, 지명, 유래 정보 제공
번호 지명 유래
14 산대월리(山帶月里) 본래 강릉군 하남면 지역으로 1914년 사천면에 편입되고 1916년 새바우, 수우동, 순포, 지재를 합쳐 산대월리라 했다
마을에서 제일 높은 봉인 매봉에서 사방으로 뻗어내린 산줄기들의 모양이 해와 달이 입을 맞추는 일월 합구형이라 하는데 달이 뜬 저녁에 산에 올라가 보면 산이 높지 않고 밋밋하여 달이 산을 허리띠로 둘러맨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또 마을에는 일희정(조선조 16대 인조때 이상필이 지은 정자)과 순개를 바라보는 언덕에 순포정이 있으며, 일희정 바로 아래 큰길가에 있는 바위에 "월산기석, 일희유촉"이란 글이 새겨져 있고 마을 남쪽에는 강릉오호 가운데 하나인 순포가 있다. 또한, 옛 일희정터 아래 순포동에 노서화전(老鼠化田)이란 곳이 명당터라 하는데 그 자리가 어딘지 몰라 묘를 쓰지 못한다고 한다.
13 방동리(方洞里) 사방이 산으로 둘러 있어 산의 형세가 (方)자처럼 되어 있어 방골 또는 방동이라 한다.
1916년 가매골, 왕상골, 후릿둔지를 합하여 방동리라 하였다. 그후 마을 인구가 늘어나 1971년 상,하리로 구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후릿둔지에는 경포해변과 연립된 송림이 우거진 해변이 있어 여름철에는 많은 피서객들이 붐빈다.
12 덕실리(德實里) 1916년 버덩말, 새이말, 앞결, 잿말을 합쳐 덕실리라고 한다.
옛 선비들이 글을 짓고 놀았던 덕장봉이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마을의 북쪽으로는 사천천이 흐르고 부근에는 경지정리된 넓은 들이 있어 기계화 영농으로 논농사가 크게 발달된 지역이다.
강릉박씨가 수대에 걸쳐 번창한 마을로 자유당때 원내총무를 지낸 박용익씨가 태어난 곳이다.
11 미노리(美老里) 이 마을은 면 소재지마을로 1916년 주막거리, 망골, 보매기, 본동을 미노리라 했다. 면소재지로 사천초등학교, 면사무소, 우체국, 농협, 파출소와 면종합복지회관이 위치해 있다. 미노리는 진흙땅이므로 미노, 이동이라 하고 또 박수량(三可公)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노모를 모시고 아름답게 늙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마을 한가운데 삼가봉이 남북으로 뻗어 있고, 조선 중종때 효자 삼가공 박수량과 그의 당숙 병조좌랑 박공달이 함께 정자를 짖고 한가로이 여생을 보냈다는 쌍간정이 동쪽 바닷가 작은 산봉우리 밑에 있다
동쪽으로는 사천해수욕장, 서쪽으로는 덕실리, 남쪽으로는 방동리, 북쪽으로는 사천천을 건너 판교리, 석교리, 사천진리와 접해 있다.
10 하평리(荷坪里) 초당 허엽의 아들인 하곡 허봉이 이곳에 살아서 그의 호를 따 하평동이라 했다
이곳에 애일당이 있으며 애일당은 조선 중종때 문신인 김광철의 옛 집터로 그의 호가 애일당이다.
그는 초당 허엽의 장인이고 허봉, 허균, 허난설헌의 외조부이다.
애일당이 있는 뒷산 형국이 도룡룡이 누워있는 것 같아서 교산이라 하는데 애일당의 외손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 이곳의 지명을 따서 자신의 호로 삼았다.
하평리는 1916년 사천진리에 편입되어 있다가 1993년 10월 4일 사천진리에서 분리되었다.
마을 뒷산에는 교산(蛟山) 허균(許筠)의 시비(詩碑)가 있으며 농악놀이가 유명한 마을이다.
9 사천진리(沙川津里) 원래 강릉부의 지역으로 동해 바닷가에 부리가 되었으므로 “불까”라 하였는데 조선 선조때 사화봉수를 두었으므로 사화진이 되고 1916년 애일당리, 행깨들, 너너불, 뒷섬, 솔마지를 합하여 사천진리라 했다
사천진리는 어촌마을로 이 마을의 어항은 1종어항으로 어장형성이 잘되어 생선이 풍부하며 강릉 경포와 연결되어 여름철에는 많은 피서객들의 줄을 잇고 있다.
8 판교리(板橋里) 1916년 이설당리와 조부동을 합하여 판교리라 했는데 양짓말 앞으로 농수로에 넓은 널빤지로 만든 다리가 있어서 이 마을을 판교라 했는데 현재는 경지정리로 없어졌다. 이설당 부근에 운양초등학교가 있다. 옛날 이 마을에 운양서당이 있었는데 그 서당 뒤에 학교를 지으니 서당 이름을 따서 학교이름을 짖게 되었다. 마을 앞 넓은 들판은 경지정리가 된 지역으로 기계화 영농이 발달된 지역이다.
7 석교리(石橋里) 1916년 현 석교 1리와 구라미를 합하여 석교리라 했다
사천천과 석교리 경계지점 사이로 흐르는 농수로가 있었는데 이 농수로에 넓적한 돌로 놓은 돌다리가 있어 석교라 했다. 그런데 이 돌다리를 농경지 정리때 옮기다가 잘못하여 반으로 갈라졌는데 그 돌다리를 일부를 현 사천중학교 옆 다리 부근으로 옮겨 놓았다.
또한 사천천을 중심으로 마을 앞으로 경지정리된 농경지로 기계화 영농이 발달된 지역이다.
6 노동리(蘆洞里) 노동은 현 노동리 중앙에 커다란 갈대밭이 있어서 갈골이라 했다. 지금은 갈대밭이 없어지고 그 자리가 기름진 옥토인 논과 밭으로 변하였으며 노동상,하리로 있다가 1985년 노동중리로 분리되었다
5 사기막리(沙器幕里) 태백산이 병풍과 같이 두루고 있는 지역으로 문헌에는 없으나 현재 “작은무일”을 위시한 주위에서 사기그릇을 만든 움막이 있어서 사기막이라 했다.
지금도 각종 공사시 사기그릇 잔흔이 발견되고 있다.
용연동에는 1984년 완공한 223만톤의 담수능력을 갖춘 저수지가 있고, 그 아래쪽에는 강원도 영동지구 자동차운전면허시험장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이 지역에서는 이조 중말기시 산송이 천량, 곶감 천량, 종이(문창호지)천량등 삼천량의 부자 마을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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