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면
총 게시물 15 개
, 페이지 1 / 2
번호 | 지명 | 유래 |
---|---|---|
15 | 제비리 | 옛날에는 연동 또는 제비골이라 하였는데 1961년 제비리라 개칭 하였다. 등고비에서 제비가 높이 날아 연소등(제비2리)에 가서 둥지를 틀고 집을 지은 형국이라 하여 제비리라 하였음. ○칠봉산 - 산북리와 동서로 경계를 이룬 산으로 산줄기에 7개의 봉우리가 있고 산정상에 봉화터가 있어 칠봉산이라 칭함. ○버들고개 - 제비리와 산북리 경계인 이 고개 일대에 버드나무가 많이 있었던 데서 유래됨 ○진골 - 구정리와 경계지역으로 옛날 이 일대가 늪이 지고 땅이 질었다고 하며, 이곳은 논이 마르지 않고 항상 물이 풍부하여 진골이라 했음. ○남밭 - 일명 여전이라고 부르는 성산면 금산리와 남대천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일제 강점기에 세부 측량을 한 후 밭이 남았다고 하여 남은 밭이라고 지어진 지명이다. |
14 | 덕현리 | 덕현리는 일명 덕고개라 불리어지기도 하며, 덕고개는 강릉과 금광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큰 고개를 두고 덕현리라 불렀다. 또한 옛날에는 부자가 많이 살았다고 하며 부자들은 마을 고개에서 덕을 받도록 산신령에 빌었다고 해서 부창골(부창) 또는 덕고개로 불리고 있다. ○덕고개 - 망덕봉으로 올라가는 큰재를 말하고 이 고개 밑에 부자들이 덕을 받도록 빌었다 해서 덕고개라 함. ○망고개 - 언별1리와 경계지점에 옛날 선비들이 말을 타고 송택서원으로 공부하러 다녔는데 그 선비들을 마중하기 위하여 이 고개에서 망을 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임. ○점촌 -금광리와 경계부근에 천주교인이 모여 살던 곳으로 옹기점을 운영하여 붙여진 지명 |
13 | 어단리 | 고려말기에는 현재 쓰고 있는 한자의 부락명을 어단리라고 불렀다 그 유래는 고려 강릉주현의 제유인 벼슬아치들이 낙향하여 금광리에 은거하면서 이곳에서 제단을 만들고 임금을 향해 망제를 올렸다하여 어단리라 불리게 되었으나 일제 강점기 민족말살 정책에 따라 어단리로 개칭하였다. ○칠성산 - 어단리의 주봉으로 왕산면 목계리와 경계 산꼭대기에 바위 일곱 개가 놓여 있는 것이 마치 칠성과 같다고 하여 칠성산이라 하며 신우제 지낸 곳이기도 함. ○설래 - 예부터 하천바닥에 물이 고이지 않고 땅속으로 스며든다 하여 붙여진 지명임. ○안심골 - 마을에서 칠성산으로 올라가면서 만장골(저수지)을 지난 오른쪽 첫 번째 골로 옛날 이곳에서 안씨가 심을 캤다고 하여 안심골이라 했다는 설과 옛날엔 안심사라는 절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전한다. ○상 촌 - 어단리 부락의 상위에 위치하고 있어 붙여진 지명임.(현재 어단1리) ○후평동 - 어단리 뒤편에 넓은 평지를 이루고 있다하여 불러진 이름이다. ○옹기점 - 일명 점촌이라 하는데 옛날 천주교가 있던 일대로 옹기점이 있었음. ○동막골 - 현재는 저수지가 있으며 마을 동쪽에 위치하여 산 아래로 옛 기와집이 있었는데 동쪽이 막힌 골이라 하여 지어진 지명임 ○진촌 - 일제 강점기 때에는 금광리로 편입되었으나 일제 말 행정구역 개편 때 어단리가 되어 새로운 마을이란 뜻으로 새마을(진촌)으로 불리고 있음. |
12 | 금광리 | 금광리는 2가지의 유래를 갖고 있다. 고려 초기 강릉주현의 제유가 한양에서 금자광록(금자광록은 고려시대 종이품 벼슬)의 벼슬로 있다가 이곳으로 낙향하여 은거 생활을 하면서 벼슬이름을 따 김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기도 하며, 또한 예부터 용금정이란 우물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부락민들은 이 우물에서 금빛이 난다해서 금광리라 했는데 이 우물은 지금도 있다. ○용금정 - 금광 초등학교 뒤편 마을 솔밭 속에 있으며 이곳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데 이 샘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함. 140여 년 전 김문인 이란 분이 쓴 용금정이란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음. ○마차골 - 어단리 송씨 집안에 태어난 아기장수가 죽자 그가 타고 다니던 말이 거친골(어단리)을 거쳐서 마차골에서 다쳤다고 마차골이라 칭함. ○금광평 - 금광의 이름을 모방해서 금광리라 했는데 근래에 전하기는 들(野)이 넓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함. |
11 | 학산리 | 연대는 잘 알 수 없으나 옛날엔 굴산리라 했는데, 그 후 황씨, 고씨가 들어와 부락을 형성하고 살 때 마을뒷산 우거진 노송에 학들이 서식해 부락의 자연경치가 절경을 이루고 있어 그들은 굴산(고산)이라기보다 학산리라고 개칭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왕고개 - 여찬리에서 학산리로 넘나드는 조그마한 고개가 있다. 이 고개 이름을 왕현이라 하는데 고려가 망할 때 공양왕이 이곳에 피신해 오면서 넘었던 고개라 해서 왕고개로 마을사람들은 부르고 있다. 또한 고려 32대 우왕때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가 최영을 귀양을 보내고 우왕을 신돈과 반야의 소생인 모이노라하여 강화도에 귀양을 보냈다가 나중에 강릉으로 옮기고 삼척에서 살해했다. 우왕이 이곳 굴산사 승려들의 도움으로 이곳에 머무르며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 한다. ○장안재 - 왕고개를 넘어 학산리로 오면서 왼쪽 능선을 타고 가다보면 가마처럼 움푹파여 있는 곳으로 고려 말 우왕이 이곳에다 행궁을 짓고 머물렀다 하여 지금도 이곳을 파보면 기와와 토기류가 나오고 있다. ○장안리 - 장안재 아래에 있는 마을로 고려 말 우왕이 이곳에 기거하므로 서울 장안과 같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 학바위 - 옛날에 마을에 처녀가 아기를 낳고 이 바위밑에 아이를 버리니 학이 나타나 어린 아이를 감싸주었다고 하며 범일국사의 탄생 신화가 담긴 바위이다. ○석천 - 재궁마을에 있는 우물로서 옛날 이 마을의 처녀가 이곳 우물에 와서 표주박에 햇빛이 담긴 물을 마시고 와서 잉태하였다고 하며 범일국사 탄생설화가 담겨있다 ○재궁말 - 학산2리 회관이 있는 마을로 이 일대를 개척한 평해 황씨들의 재실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재궁말 뒤편에 학바위가 있다. ○탑골 - 옛 굴산사의 유물인 부도탑이 있다하여 탑골이라 칭한다. ○광명마을 - 옛날부터 살고 있던 씨족마을에 타지에서 들어와 살기 어려워 넓은 부락 내 새로운 부락을 형성하여 살게 된 이후부터 광명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
10 | 본동(봉양촌) | 여찬리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봉조조양이라는 이름을 따서 봉양촌 이라 하며 현 면소재지 부근을 말함. |
9 | 여찬리 | 이조말엽까지는 풍양촌이라 했는데 옛날 냇가에 개오동나무가 많아 봉황이 자주 놀러와 봉조조양이라 하여 그 글귀를 따서 봉양동이라 불리다 일제 때 여찬리로 개칭했다. ○본동(봉양촌) - 여찬리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봉조조양이라는 이름을 따서 봉양촌 이라하며 현 면소재지 부근을 말함. ○자조아리(자조동) - 강릉시와 경계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약 200년 전 조시달이란 분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스스로 도와가면서 살았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범고개(호현) - 개낼(내곡동)과 경계지점으로 고개가 험하여 범이 살았다고 하여 범고개라 칭한다. ○새끼미 - 왕고개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마지막 봉우리로서 모산봉에서 갈라져 나온 새끼라는 뜻으로 붙인 지명임. ○말미골(마미동) - 여찬리 서북쪽으로 정등골 남쪽 삼정재 아래골로서 삼정재로부터 말꼬리처럼 길게 뻗은 골이라 하여 말미골이라 함. |
8 | 청파동 | 매봉산의 산기슭에 내를 중심으로 좌반둔지와 어삼밭골로 나누어져 있는데 좌반둔지는 매봉산에서 내려다 보면 수려한 묘지가 있어 현지에 와보면 어디인지 알수 없는터라 잡았다 놓치고 하여 잡은 둔지라 불리우다 일제식민치하에 잣나무를 계획 조림을 하였다해서 잣밭둔지로, 5.16혁명후에는 청송심씨인 심기연이란 분이 이곳을 자비로 개간하여 경작하게 하므로서 입주한 주민들이 그의 호 인 청파를 따서 청파동이라 칭하고 있음. |
7 | 매봉 | 구정면 내에서는 가장높은 해발 817.5m 고봉으로 이곳에 사람이 살지 않던 시절 에 어느날 바다에서 해일이 일어 강릉일대가 침수되고 산꼭대기에 매 한 마리가 앉을 수 있는 땅만 남겨놓고 침수되자 마을 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매봉이라 불러오고 있으며 산모양이 매가 날개를 펼친 것처럼 생겼다고도 하며 매봉산이라 칭하고 있음. |
6 | 수리골 | 왕산면 도마리와 경계지점에 골이 깊고 水量이 많아 이롭게 쓸수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