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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4.06.21, 조회수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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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릉 학생 독립운동 : 동아일보 19331021
작성자 함문숙
내용 강릉 학생 독립운동 : 동아일보 193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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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농교 맹휴생으로 잠입 활동한 30명
【만주로 망명했던 교원과 생도】
각지에서 1, 2명씩 잠입 재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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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의 “중심지가 강릉에 있는 것만은 사실”인데, 강릉에서 검거된 인물 가운데는 이번 사건을 총지휘한 중심 인물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강릉이 본부격으로 전 조선적으로 대 활동을 파견하였던 것”이라 한다.
사건의 내용을 보건대 강릉농업학교 교원과 학생으로 조직된 좌익 결사는 첫 번째 착수로 표면운동을 일으키려 하였고, “강릉농업학교를 불시 검문하며 곤봉으로 강릉농업학교 교원을 난타하여” 듣기에도 새로운 일이 발생하였다.
작년 그믐경에 반발한 그(경찰의 강릉농업학교 교원 난타) 사건이 있은 후, 강릉농업학교 교원과 학생으로 조직된 “○○단원” 30여명은 한 단체가 되어 망명하여 멀리 국경을 넘어 奉天(중국)에까지 갔다가 재차 조선 안에 들어와서 각지에 둘씩 혹은 셋씩 대원을 풀어서 극비밀리에 이 재건 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이라 한다.
그 본부도 역시 강릉에 있었으며 동지들 사이에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암호를 쓰고 기관지를 발간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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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 본부를 비치하고 전조선 적화 공작
검거는 이후로도 계속
서대문경찰서 사건의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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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의 사건에서 단서를 얻어 활동을 개시한 서대문경찰서 고등계에서는 강릉시 내·외는 물론이고 전 조선 각지에서 검거의 선풍을 일으키며 이미 50명을 검거하였다. 아직도 쉬지 않고 활동을 계속하고 있어서 그 종말은 알 수 없다.
요시노(吉野) 주임을 제외한 각 부장과 형사들은 道(강원도) 경찰부의 응원을 얻어 사방팔방으로 뻗쳐있다. 각지 경찰의 응원을 받아 검거에 노력하여 혐의자로 검거된 사람은 대강의 취조를 마치고 곧 경성으로 압송할 예정이다.
강릉경찰서 유치장은 대 만원으로 道 경찰부 유치장에도 20여 명을 수용하고 있다. 한편으로 검거가 끝나는 대로 취조에 착수할 모양인데 “내용은 아직도 비밀에 부치므로” 확실한 판명은 볼 수 없다.
결사의 내용은 유연한 조직체를 구성하고, 교묘한 연락과 활동으로 “전 조선적으로 각지에서 소란을 일으켰다”는 실지 운동으로 판명되었는데 상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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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취소 이후 재건 설계책
중공당 지령에 좆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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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12월 7일에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가 모두 국제당파회로부터 그 승인이 취소를 당하자 조선의 공산운동의 체계는 중국공산당의 지휘 아래 움스가 되었다 한다.
이리하여 1, 2, 3차의 대 검거를 겪어 지리멸렬하던 조선공산당의 재건설을 목적한 운동이 중국공산당의 계통을 통하여 극비밀리에 전개되어 적색노동조합의 운동과 함께 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그리하여 북경으로부터 조선 안에 연락을 도모하여 당국의 경계망을 물어가면서 지하운동을 하던 것이 이번에 검거된 사건의 중심이라 한다.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라는 비밀지령을 가지고서 극비밀리에 조선 내에 잠입한 모모 분자는 곧 동지를 얻어 활동을 개시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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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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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재건을 목적한 별항 조직은 각지에 『야체이카』를 두고 그 아래는 공장반으로 『푸렉숀』을 두어 공장지대에 적화를 도모하고 또 학교에는 반제동맹(反帝同盟), 적색독서회(赤色讀書會)를 조직하여 학교 내에서 적화사상의 보급을 도모하고 그들을 연락하는 『오르그』와 또 아직도 무슨 조직체를 이루지 못한 곳이나 단체는 선전반을 두어 활동하였던 것으로 전 조선적으로 이들은 벌써 통제된 조직체를 구성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공장반과 학생반은 각기 그 학교나 공장의 직공과 학생을 상대로 적화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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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경찰서에서
주모자 엄격 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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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경찰서 고등계에서 검거중에 있는 종방(鐘防) 서울고무 맹파(파업) 사건 진상은 판명되었으나 주모자가 벌써 교묘히 도주하여 사건의 단락을 짓지 못한다고 한다.
이번 사건의 『심파』로 許均이란 여직공과 權五×(※ 다른 신문에는 권오훈) 외 67명의 청년 그리고 17일 청량리에서 검거한 李丙희 李孝貞 등도 심파로서 활약하였는데 그들의 말을 들으며 선동한 주모자의 정체를 그네들도 자세히 알 수 없는 정체 모를 청년이라고 한다.
주모자의 신장 밖에 모르게 된 경찰은 그를 체포하기에 큰 고심을 하고 있으며, 그 인물이 어떠한 정체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어 경찰에서도 초조한 가운데 그의 자체를 엄탐 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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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극 사건 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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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극장 관계자 申鎔熙 이하 申揇, 成東鎬 등 3명에 대한 사건은 기보도한 바와 같이 그동안 취조를 마치고 20일 무고죄로 입건 서류와 한가지로 검사국에 송치하였다 한다.




(해석)
조선총독부 통치하에서 우리 민족이 핍박과 착취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국권을 회복하는 도구로 강릉의 청년들은 공산주의를 선택하였다. 중국과 소비에트 공산주의와 연계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일제의 착취와 궁핍한 생활 속에서 조선의 국민들은 적색노동운동, 적색농민운동, 적색독서회, 반제 민족주의, 계몽적 야학과 문화활동, 교회와 사찰 등을 통해 독립 의지를 키웠다.

동아일보 1933년 10월 21일자는 강릉의 소년, 소녀, 청년들은 강릉에 본부를 두고 비밀결사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강릉의 청년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서울, 경기도 뿐 만 아니라 만주에도 있었고, 한반도에서 전국적인 대 활동을 하였다.
비밀결사의 내용은 유연한 조직체를 구성하고, 교묘한 연락과 활동으로 전 조선적으로 각지에서 “소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소란은 만세운동을 말하며, 전국에서 계속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3.1 독립 선언, 메이데이, 6.10 순종 장례일, 8.29 국치일 등)
1932년 그믐경에 경찰이 강릉농업학교를 습격하며 선생을 곤봉으로 난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처음보는 상황에 분노를 하였던 강릉농업학교의 선생과 학생 30여명은 중국 奉天에 가서 “○○단원”이 되었다.
奉天에는 大韓獨立團의 支團이 설치되어 있었다.
강릉농업학교 학생들은 전국적인 비밀결사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신문보도와 조선총독부 판결문에는 “독립”에 관한 내용은 “○○운동” 또는 “○○단”으로 표기되어 있다. 1936년 4월 30일 저녁에 메이데이 전날 발생한 함흥형무소 만세 사건은 사상수 370여명이 “○○가”를 부르고 “○○○○만세”를 고창하였다고 보도되었다. 실제로는 천여명의 재감자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사건이다. 1930년 8월 2일에는 대구형무소에서 장진홍 의문사가 발생하여 천오백 명의 재감자가 만세를 불렀다. 신문보도는 형무소에서 “소란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함흥과 대구에서 만세 사건은 여러 차례 발생 되었다. 모래밥을 먹으며 고문으로 인한 의문사가 발생하던 형무소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함흥형무소와 대구형무소에서 외쳤던 “독립만세”는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지 않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통하여 선진국으로 발전한 대한민국의 풍요와 자유는 지난 100여 년간 선조들이 흘린 피와 수많은 희생으로 얻어진 것이다.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강릉의 청년들과 같이 강릉인들은 글로벌 리더로 성장해 가길 바란다.


※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강릉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다음과 같다.
조선공산당재건동맹, 강릉공산당청년동맹, 강릉적색농민조합, 조선공산당공작 강릉위원회, 강릉반제그룹, 혁진회, 사회운동중앙협의회, 태평양노동조합, 신리면사회운동협의회, 적색노동조합, 주문진노동조합, 신간회, 독립단(○○단), 진흥회 잠입 활동, 주문진 무명그룹 등등


※ 강릉시청은 “부산일보 1933년 6월 28일”자 독립운동 게시물을 삭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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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농업학교 2명(최○○, 고○○)의 배신으로 인하여 동아일보 1933년 10월 21일자 보도와 같이 전국적인 독립운동 활동하던 강릉의 비밀결사 30여명이 검거되고,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서 고문을 당하였다. 더러는 후유증으로 사망하거나 평생 질병에 시달렸을 것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운동하던 강릉 청년들의 비밀결사는 최○○과 고○○에 의하여 와해 되었다.
강릉의 후배들이 일본어 신문인 부산일보를 직접 해독하기 바란다.(※ 출처 : 신문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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