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담

김담(金譚)
  • 진재(眞齋)
  • 출생년도1522년
  • 사망년도미정

조선시대 효자로서 자(字)는 담지(譚之), 호는 진재(眞齋), 본관은 강릉이다.

진사 필양(匹陽)의 현손(玄孫)이고, 진사 반석(盤石)의 손자이다.

부친은 낭장(郞將) 김광복(金光輻)이다.

중종 17년(1522)에 18세의 나이로 낭해(郞解)에 뽑혀 예위(禮圍)에 갔을 때 중국인 관상가가 이르기를 "골상(骨相)은 귀인의 형상이며 벼슬길에 나아가 귀하게 되면 명이 길지 못할 상이라" 하였다.

이에 벼슬길을 사양하고 어버이 봉양에 일관하였다.

만년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직을 받았으나 또한 사양하였다.

한편 그의 지극한 효성을 보면, 부친상을 당하여 슬픔을 다하였으며, 예로써 장례를 치루었다.

조석으로 상식을 올린 술잔이 스스로 말랐으며, 묘역에다 석물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돌을 쪼개기가 어려워 그 돌을 붙들고 슬프게 울자 돌이 먹줄을 따라 갈라졌다.

고을 사람들이 그의 효성에 하늘이 감동하였다고 하면서 탄복하였다.

명종이 승하하자 마음으로 삼년상을 입었다.

봉래 양사언이 시를 지어 주었으며, 또한 그의 지극한 효성을 기렸다.

이에 그의 여각(閭閣)은 현재 강릉시 노암동 병무청 맞은 편에 자리하고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발문(跋文)을 짓고, 양사언이 썼다.

그리고 '삼세사효지각(三世四孝之閣)'이란 서액(書額)은 추사(秋史)가 썼다.

이러한 효성으로 김담은 12향현을 배향하는 강릉향현사(江陵鄕賢祠)에 1759년 추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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