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우

최운우 (崔雲遇)
  • 도경(蹈景), 학구(鶴衢), 향호(香湖)
  • 출생년도1532년
  • 사망년도1605년

자는 시중(時中), 호는 도경(蹈景), 학구(鶴衢), 향호(香湖)이다.

부마(駙馬) 문한(文漢)의 후손으로 증예조참판(贈禮曹參判) 자점(自霑)의 증손이며 진사 호(浩)의 아들이다.

명종 7년(1552)에 생원시에 올랐다.

이후 학문에 정진하여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도의(道義)를 나누었다.

선조 1년(1568)에 천거되어 횡성현감(橫城縣監)에 제수되었는데 그가 부임할 때 이규(李逵)는

'갈길이 이렇게 어려운데 (행로난어차-行路難於此)

그대는 먼길에 다시 오르니 (부군복원정-夫君復遠程)

큰 재주로 옛글을 생각하고 (대재회숙석-大才懷宿昔)

박한 벼슬로 평생을 지내니 (박환부평생-薄宦負平生)

해안에는 매화가 피고 (해안총매화-海岸叢梅花)

산 골짜기에는 괴이한 새소리 나네 (산교괴조명-山橋怪鳥鳴)

서로 헤어지는 서러움이여(이혼정소색-離魂正蕭索)

경색만 어루만지며 서글품 못잊으리 (무경불승정-撫景不勝情)'라는 시를 지어 주었다.

이후 왕자부(王子傅)가 되었으며 선조 4년(1571)에 비변사(備邊使)로 천거되었다.

한편 그는 퇴향하여 함헌(咸軒)등과 더불어 서원건립의 공론을 일으겨 오봉서원 건립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그가 머물렀던 향호(香湖―현재의 주문진읍 향호리의 호수) 주변에 향호정(香湖亭)을 짓고 문객들과 교유하였다.

그는 향촌교화에도 힘을 기우려 소학(小學)을 강의하고 연곡향약(連谷鄕約)을 시행하였다.

그는 인조 23년(1645)에 향현사에 배향되었고 사후 철종 12년(1861) 비(碑)가 세워졌는데, 비문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지었고, 음기(陰記)는 보국(輔國) 윤정현(尹定鉉)이 지었다.

예조판서(禮曹判書) 김기만(金箕晩)이 글씨를 썼다.

그의 문집으로는[향호집(香湖集)]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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